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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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라스 전투는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 근처에서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당나라의 서역 진출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이끄는 군대와 아바스 왕조의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지휘하는 군대가 격돌했다. 전투는 당나라의 동맹 세력이었던 카를루크 투르크족의 배신으로 당나라 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이슬람 세력이 중앙아시아에 확고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제지 기술자들을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파되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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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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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전투 | 탈라스 전투 |
다른 이름 | 怛羅斯戰役 (중국어) معركة نهر طلاس (아랍어) Maʿrakat nahr Ṭalās (아랍어 음역) 탈라스 회전 |
일부 | 트란스옥시아나의 이슬람 정복의 일부 |
시기 | 751년 5월 ~ 9월 |
장소 | 타라즈 또는 탈라스 |
결과 | 아바스 왕조의 승리 |
교전 세력 | 아바스 왕조 티베트 제국 |
반대 세력 | 당나라 카르코타 왕조 |
지휘관 | 아바스 왕조/티베트 제국: 알사파 아부 무슬림 호라사니 지야드 이븐 살리흐 당나라/카르코타 왕조: 고선지 이사예 단수실 |
병력 규모 | 아바스 왕조: 30,000명 당나라: 10,000명 |
추가 병력 | 20,000명의 투르크 용병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카를루크족, 이후 아바스 군대로 전향) |
사상자 | 불명 |
지도 | |
배경 | |
원인 |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당나라와 아바스 왕조의 경쟁 |
전투 과정 | |
주요 사건 | 카를루크족 용병의 배신, 당나라 군대의 붕괴 |
영향 | |
결과 | 아바스 왕조의 중앙아시아 지배력 강화 제지술의 서양 전파 |
참고 | |
관련 전투 | 트란스옥시아나의 이슬람 정복 |
2. 배경
751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당나라가 아바스 왕조를 침공하며 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당나라의 고선지는 신강 지역을 지배하던 안서도호부에서 서쪽으로 계속 정복을 시도하고 있었다.
750년, 고선지는 소그디아나를 침략했다. 소그디아나 국왕은 이에 놀라 고선지 군의 침략에 살아남기 위해 아바스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고,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은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했다. 지야드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 방어군과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원정군은 톈산산맥 서북쪽 기슭의 탈라스강에서 격돌했다.[10]
750년, 당나라 장군과 아바스 왕조 장군은 타슈켄트와 페르가나의 왕들이 지배권 다툼에서 제국의 지원을 구하면서 만나게 된다. 고선지는 포위전 끝에 아바스 왕조가 지배하는 타슈켄트를 정복했다. 아바스 왕조의 장군 زياد بن صالح الحارثي|지야드 이븐 살리흐ar는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로 도망쳐 군대를 모아 동쪽으로 진군하여 당나라 군대와 맞섰다. 페르가나에서 고선지는 카를루크 투르크족을 모병하여 군대를 모았다.
2. 1. 당나라의 서역 진출
측천무후는 692년 당나라의 내아시아 확장의 일환으로 티베트 제국으로부터 타림 분지를 탈환했고, 오아시스 도시들은 당나라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5]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한때 돌궐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7세기 후반 돌궐의 여러 부족 연맹은 혼란에 빠졌다. 705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은 우마이야 칼리파 군대를 이끌고 실크로드를 따라 도시들을 정복하는 원정을 시작하여 돌궐 내부의 분쟁을 이용했다.[5] 칼리파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하여 제국의 동쪽 국경을 확장했다.동시에 돌궐 카간 술룩은 내분 중인 돌궐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다.[6] 무슬림, 티베트, 당나라 군대는 두 차례 충돌하게 된다. 715년, 알루타르는 우마이야와 티베트 군인들의 도움으로 페르가나의 왕으로 즉위했다. 폐위된 이크시드는 당나라가 지배하는 쿠차로 도망쳐 당 현종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만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이크시드를 페르가나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717년, 티베트 제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 우마이야 군인들이 타림 분지의 악수를 포위했지만, 악수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에게 패했다.
715년, 당나라 황제는 돌궐 부족 지도자 술룩의 카간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당나라 군대 내에서 공작의 지위를 제안했다. 이에 술룩은 티베트인들과 함께 타림 분지로 침입했지만, 아시나 선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7] 술룩과 그의 군인들은 정기적으로 우마이야-당나라의 오아시스 도시 지배에 도전했다. 술룩이 죽기 전, 그의 군인들은 736년 당나라에게, 737년에는 칼리파에게 패했다.[8] 동시에 돌궐 부족들은 당나라가 지배하는 페르가나 계곡에 금속 산업을 설립했는데, 이 지역은 중요한 철 생산 중심지이기도 했다. 카를루크는 톈산 주변에 정착한 세 돌궐 부족의 연합체로, 티베트 제국과 당나라에 철 무기를 생산하여 수출했다.[9]
747년, 티베트 제국과 파미르 산맥에서 성공적으로 싸운 당나라 장군 고선지는 길기트 지역을 장악했다. 750년, 안서(安西) 절도사(節度使)로서 서역(西域)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서쪽 소그디아나(중앙아시아)에 압력을 가했다.
2. 2. 아바스 왕조의 동진
747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을 메르브에서 몰아낸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은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했다.[10] 아부 무슬림은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포함한 군대를 모아 서쪽으로 파견하여 우마이야 영토를 장악했다.748년 초, 아부 무슬림은 그레이터 호라산의 수도 메르브를 점령하고, 이후 아바스 혁명을 이끌었다. 750년, 아부 알-압바스 알-사파가 쿠파의 대모스크에서 첫 번째 압바스 칼리프로 선포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파는 750년 자브 전투에서 멸망했다.[10]
705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은 우마이야 칼리파 군대를 이끌고 실크로드를 따라 도시들을 정복하는 원정을 시작하여 돌궐 내부의 분쟁을 이용했다.[5] 칼리파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정복하여 제국의 동쪽 국경을 확장했다.
2. 3. 중앙아시아의 정세
715년, 알루타르는 우마이야 왕조와 티베트 제국 군인들의 도움으로 페르가나의 왕이 되었다. 폐위된 왕 이크시드는 당나라가 지배하는 쿠차로 도망쳐 당 현종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만 명의 당나라 군인들이 이크시드를 페르가나의 왕으로 복위시켰다.[5] 717년, 티베트 제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 우마이야 군인들이 타림 분지의 악수를 포위했지만, 악수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에게 패했다.[5]715년, 당나라 황제는 돌궐 부족 지도자 술룩의 카간으로 인정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당나라 군대 내에서 공작의 지위를 제안했다. 이에 술룩은 티베트인들과 함께 타림 분지로 침입했지만, 아시나 선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7] 술룩과 그의 군인들은 정기적으로 우마이야-당나라의 오아시스 도시 지배에 도전했다. 술룩이 죽기 전, 그의 군인들은 736년 당나라에게, 737년에는 칼리파에게 패했다.[8] 동시에 돌궐 부족들은 당나라가 지배하는 페르가나 계곡에 금속 산업을 설립했는데, 이 지역은 중요한 철 생산 중심지이기도 했다. 카를루크는 톈산 주변에 정착한 세 돌궐 부족의 연합체로, 티베트 제국과 당나라에 철 무기를 생산하여 수출했다.[9]
747년, 티베트 제국과 파미르 산맥에서 성공적으로 싸운 당나라 장군 고선지는 길기트 지역을 장악했다.[10]
3. 전투 경과
751년 7월, 카를루크 용병을 포함한 아바스 왕조 군대는 타라스 강변에서 당나라 군대와 대치했다. 고선지와 지야드 이븐 살리흐는 각각 비슷한 진형을 갖추었는데, 당나라 군은 앞줄에 석궁병과 창병, 그 뒤에 경기병 부대, 양쪽 측면에 카를루크 투르크족을 배치했고, 아바스 왕조 군은 앞줄에 궁병, 그 뒤에 창병, 그리고 호위병과 함께 중장기병을 배치했다.[15]
전투는 처음 3일 동안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나라 군은 석궁병의 정확한 사격과 사거리 우위를 바탕으로 아랍 궁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15], 아랍 창병이 돌격해 당나라 정규군 중장보병과 충돌했으나, 당나라 군은 더 나은 갑옷 덕분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랍 보병을 밀어붙였다.[16] 아바스 왕조는 중장기병으로 당나라 경기병 부대를 공격했지만, 고선지는 예비대를 투입하여 이를 막아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넷째 날에 카를루크 용병들이 당나라를 배신하고 좌우 측면을 공격하는 동안 아바스 왕조 보병이 정면으로 돌격하면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17]
3. 1. 전투의 시작
750년, 고선지는 소그디아나를 침략하였다. 소그디아나 국왕은 이에 놀라 고선지 군의 침략에 살아남기 위해 아바스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고, 747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을 메르부에서 몰아낸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 아부 무슬림은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했다.[1] 지야드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 방어군과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원정군은 톈산산맥 서북쪽 기슭의 탈라스강에서 격돌했다.[1]3. 2. 양측 군대의 병력 규모와 구성
탈라스 전투에 참여한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여러 기록을 통해 양측 군대의 규모와 구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당나라 군대:
-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는 약 3만 명(혹은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족과 토착민으로 구성되었다.[13]
- 『통전』(801년)에는 3만 명의 사망자가, 『구당서』(945년)에는 2만 명의 사망자가 기록되어 있다.[12]
- 당나라 군대는 앞줄에 석궁병과 창병, 그 뒤에 경기병 부대, 그리고 양쪽 측면에 카를루크 투르크족을 배치하는 진형을 갖추었다.
- 전투 초기에는 석궁병의 정확한 사격과 사거리 우세를 바탕으로 아랍 궁병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15]
- 정규군 중장보병은 더 나은 갑옷을 착용하여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아랍 보병을 밀어붙였다.[16]
아바스 왕조 군대:
-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 군대는 약 4만 명으로 추정된다.
- 아랍 측 초기 기록인 『알카밀 피 앗타리크』(1231년)에는 5만 명의 사망자와 2만 명의 포로가 언급되어 있다.[12]
- 무슬림 군대는 앞줄에 궁병, 그 뒤에 창병, 그리고 호위병과 함께 중장기병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진형을 갖추었다.
전투 양상:
- 전투 초반 3일 동안은 양측이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 4일째 되는 날, 카를루크 용병들이 당나라를 배신하고 아바스 왕조에 가담하면서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17]
- 카를루크 군대가 당나라 군대를 측면에서 공격하고, 아바스 왕조 주력 부대가 정면 공격을 가하면서 당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
결과적으로, 카를루크 용병의 배신과 페르가나 동맹군의 후퇴로 인해 당나라 군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3. 3. 카를루크의 배신
751년 7월,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이끄는 아바스 왕조 군대와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천산산맥 북서쪽 기슭 타라스 강(타라스) 강가에서 충돌했다.[12] 전투 도중, 당나라 군대에 합류했던 카를루크족이 아바스 왕조 측으로 돌아서면서 당나라 군대는 궤멸되었다.[17]
당나라 군대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카를루크 용병들은 전투 중 아바스 왕조에 투항했다.[17] 카를루크 부대가 근접전으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는 동안 아바스 왕조 주력 부대는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왔다.[17]
페르가나 동맹군마저 후퇴하면서, 당나라 군대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참패했다.[17] 고선지는 패배가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이사예의 도움을 받아 일부 당나라 정규군과 함께 탈출했다.[17] 1만 명으로 추산되는 당나라 군대 중 2천 명만이 중앙아시아 영토로 돌아왔다.[17]
이븐 알아시르의 『완사(完史)』에 따르면, 아바스 왕조군은 "당나라 군대 5만 명을 죽이고 2만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12]
3. 4. 전투의 결과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카를루크 용병의 배신과 페르가나 동맹군의 후퇴로 인해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에게 참패했다. 당나라 군대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카를루크족은 전투 중 아바스 왕조에 투항했고, 카를루크 부대의 기습과 아바스 왕조 주력 부대의 정면 공격에 당나라 군대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17] 고선지는 패배를 직감하고 이사예의 도움을 받아 일부 당나라 정규군과 함께 탈출, 1만 명의 당나라 군대 중 2천 명만이 중앙아시아로 귀환했다. 이사예는 두언소시에게 질책받았으나, 추격하는 아랍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12]이븐 알아시르의 『완사(完史)』에 따르면, 아바스 왕조는 당나라 군대 5만 명을 죽이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나라 측 피해는 막대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고선지의 원정군은 탈라스강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72개가 넘는 국가를 정복하면서 피로가 극에 달했고, 설상가상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한 카를루크족이 아바스 왕조 측으로 돌아서는 등 연이은 악재로 패전했다.[18][19]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이라는 거대한 내전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 중앙아시아 원정을 중단해야 했다. 그 직후 당나라 주둔군이 철수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이슬람교가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또한, 당나라 기술자들이 아바스 왕조로 넘어갔는데, 그들 중에는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제지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어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몇 안 되는 전투 관련 아랍 문헌 중 하나인 알 마크디시의 기록에 따르면, 아바스 칼리파의 장군 아부 무슬림은 5,000명의 중국 포로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영의 물품을 압수했다. 알 마크디시에 따르면, 아부 무슬림은 더 많은 당나라 영토를 침략하기 위해 군대와 장비를 준비했지만, 칼리파 앗 사파로부터 호라산 총독으로서의 봉사가 필요하다는 편지를 받았다.[20] 탈라스 전투 이후 아랍인들은 중국군이 길기트 지역을 비우도록 강제했다.[21][22][23][24][25]
탈라스는 오늘날 키르기스스탄에 있으며 실크로드의 일부였다. 중국 돈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를 따라 쿠차와 같은 오아시스 도시들을 지나 아랍인들이 트란스옥시아나라고 부르는 지역을 통과하는 도로가 있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실크로드는 탈라스,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호라즘을 통과했다. 남쪽으로 돌아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즈,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도로를 통해 쿨롭과 발흐( 박트리아 지역)를 지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오늘날 인도는 밤얀을 통과하는 도로를 통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갈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무역로를 따라 이슬람의 영향력은 8세기에 시작되었고, 탈라스 전투가 그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탈라스 전투 이전에는 불교도들이 대부분의 도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불교는 탈라스 전투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40]
4. 1.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
탈라스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세력의 안정적인 지배가 확립되었고, 소그드인과 투르크계 여러 민족 사이에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나갔다. 당나라의 세력은 타림 분지로 한정되었고, 곧이어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는 옛 적국인 아바스 칼리파국으로부터 아랍인의 원군까지 받아야 할 정도로 약화되어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력이 후퇴하였다.[2]4. 2. 당나라의 쇠퇴와 동아시아 정세 변화
안사의 난은 중앙 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고 북서부 국경에서 철군하게 만들었다. 아랍인들이 전투 후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탈라스 전투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았다.[26][27] 전투 후 소수의 카를루크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대다수는 10세기 중반 술탄 사투크 부그라 칸이 카라한 왕조를 세울 때까지 개종하지 않았다.[28][29][30][31][32] 이는 당나라가 중앙 아시아에서 사라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754년 칼리파 앗 사파가 죽은 뒤, 중국 자료에 따르면 그의 후계자인 압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는 정기적으로 중국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알 만수르의 사절단은 중국에서 '하이 타시'(검은 옷)로 알려져 있었다.[33]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755년~763년)과 그 후의 군벌 시대는 티베트인들이 아랍과 중국 사이의 지역을 장악하고 당나라의 영향력이 후퇴함에 따라 아랍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더욱 확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당나라 군대는 약 1세기 동안의 주권을 누린 후 북서부 국경에서 철군해야 했고, 이로써 중앙 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존재는 사실상 종식되었다.[34] 756년 알 만수르는 당 현종을 돕기 위해 3,000명의 용병을 파견했다.[35] 안사의 난 동안 양주 대학살 (760)에서 천승공에 의해 아랍과 페르시아 무슬림 상인들이 학살당했다.

당나라는 안사의 난 후 수십 년 만에 권력을 회복했고, 840년에서 847년 사이에 몽골의 위구르 카간국 멸망과 같은 공세적인 정복과 원정을 계속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소의 난(874년~884년)은 황소가 북쪽을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사의 난 때 수이양 전투로 인해 실패했던 남중국까지 진군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권력을 영구적으로 파괴했다. 황소의 군대는 남중국에서 878~879년에 광저우의 항구이자 무역 중심지에서 아랍과 페르시아 무슬림, 조로아스터교도, 유대인, 기독교 상인들을 대상으로 광저우 대학살을 저질렀고, 당나라의 수도인 낙양과 장안을 모두 함락했다. 중세 중국 자료에 따르면 황소는 800만 명을 살해했다고 한다.[36] 황소가 결국 패배했지만, 당나라 황제들은 지역의 절도사와 당 조정에 투항했던 황소의 전 부하 주전충에게 모든 권력을 잃었다. 주전충은 당나라 황제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장안을 해체하여 자재를 동쪽 낙양으로 옮기면서 수도를 옮기도록 강요함으로써 장안의 파괴를 완료했다. 주전충은 907년 마지막 당나라 황제를 폐위하고 후량 (오대 십국)을 건국하여 지역의 절도사 군벌들이 자신의 왕조와 왕국을 선포하면서 중국을 오대 십국 시대로 몰아넣었다.
8세기 후반, 티베트 제국은 티베트 군대가 인도 왕국으로부터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의 영토를 정복하고 동인도 팔라 제국의 건국을 지원한 시기에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37] 5대 압바스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 시대에 당나라, 위구르 투르크 그리고 압바스 칼리파 사이에 공식적인 군사 동맹이 체결되어 아랍과 함께 서티베트 국경에서 티베트 군대와 교전했다. 동시에 위구르인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티베트인들과 싸웠다.[38]
탈라스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 이슬람 세력의 안정적인 지배가 확립되었고, 소그드인과 투르크계 여러 민족 사이에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나갔다. 당나라의 세력은 타림 분지로 한정되었고, 안사의 난 때는 옛 적국인 아바스 칼리파국으로부터 아랍인의 원군까지 받을 정도로 약화되었다.
4. 3. 제지술의 전파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제지 기술자들을 통해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었다.[46][47] 11세기 페르시아 역사가 알-타알리비는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인들이 사마르칸트에 제지술을 전파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아바스 왕조 점령지에서 제지 기술을 계속 전수했다.그러나 알-타알리비의 기록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8세기 이미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종이가 사용되었고, 투르판, 고창 지역에서는 4~5세기에 제작된 종이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둔황과 로란에서는 4~6세기 소그드어 편지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사마르칸트와의 소통 내용이었다. 조나단 블룸에 따르면, 사마르칸트에서는 전투 수십 년 전부터 종이가 사용되었고, 현지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그 산의 산악 요새인 판자켄트 근처에서 발견된 종이 문서들은 트란스옥시아나의 이슬람 정복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지역 생산품이거나 불교 승려들이 가져온 것일 수 있다. 8세기 중국 종이는 주로 목피 섬유로, 이슬람 종이는 헝겊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블룸은 제지업자들이 이미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하며 헝겊 조각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두환은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중국으로 돌아와 여행기를 출판했는데, 아바스 왕조 통제 지역에서 중국인 포로들이 비단 직조 등 중국 공예품을 계속 생산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중국 자료나 당시 아랍 기록에는 전쟁 포로를 통한 기술 이전 기록은 없다. 10세기 바그다드의 저술가 알-나딤은 중국 장인들이 호라산에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794~795년 바그다드에 최초의 제지 공장이 세워진 후에야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종이가 생산되기 시작했고, 종이가 파피루스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탈라스 전투가 제지술 전파의 결정적 계기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에 이슬람 세력이 안정적으로 지배를 확립하고, 소그드인과 투르크계 여러 민족 사이에 이슬람교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4. 4. 문화 교류
탈라스 전투는 동서 문명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제지 기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파된 것이 대표적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제지 기술자들 중에는 종이 제조 기술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1] 이들은 아바스 왕조로 끌려갔고,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이 세워지면서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1]탈라스 전투 이후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세력의 안정적인 지배하에 놓였고, 소그드인과 투르크계 민족들 사이에서 이슬람교가 널리 퍼졌다.[1] 그러나 이것이 불교와 중국 문화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카라 키탄이 셀주크 제국과 카라한 투르크를 격파한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4. 5. 현대적 평가
초기 역사가 바르톨드(Vasily Bartold)는 탈라스 전투가 서투르키스탄(Western Turkestan)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전투를 통해 중국 문명과 이슬람 문명 중 어느 쪽이 투르키스탄을 지배할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47] 당나라가 8,0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이는 안사의 난 직전 50만 명이 넘는 총 병력에 비하면 적은 수였다.[47] 초기 아랍 역사서에는 이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이븐 알 아티르(Ibn al Athir)의 기록은 중국의 《당서》를 통해 확인된다.[47]시노르(Denis Sinor)는 서돌궐 제국의 내정 간섭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돌궐 제국의 멸망으로 무슬림들은 가장 큰 적을 제거했지만, 탈라스 전투 자체가 중국 세력의 종식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48]
중국 역사가 백수의(Bai Shouyi)는 탈라스 전투와 동시에 당나라가 청해(Qinghai)의 시보(Shibao)시에서 수야브(Suyab)로 군대를 파견하여 투르게시(Turgesh)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탈라스 전투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다고 주장했다.[47] 고선지의 뒤를 이은 풍창칭(Feng Changqing)은 카슈미르 지역을 휩쓸고 길기트(Gilgit)를 점령했으며, 타슈켄트(Tashkent)도 다시 당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백수의는 파미르 산맥 서쪽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도 전투로 인해 중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47] 이슬람 지배하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아랍에 대항하여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했고, 페르가나(Ferghana)는 안사의 난 당시 당나라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47] 백수의는 아바스 왕조가 전투 후에도 중국에 사절을 계속 보냈고, 752년부터 798년까지 13차례의 외교적 선물 교환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중국과 아랍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47]
학종정(Xue Zongzheng)은 종이 제작 기술의 전파 외에 이 전투로 인한 지정학적 또는 인구 통계적 변화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오히려 751년 이후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755년에 당나라의 권력은 중앙아시아에서 정점에 달했다. 카를루크(Karluks)는 전투 후에도 중국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753년에는 카를루크 야브구(Karluk Yabghu)가 당나라에 항복하고 칭호를 받기도 했다.[49]
5. 기타
탈라스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 근처 타라즈와 탈라스 부근으로 추정된다. 중국식 이름 怛羅斯(Dáluósī)는 현장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두환은 그 도시를 추이 강의 서쪽 배수로 근처에 위치시켰다.[1]
5. 1. 전투 장소
탈라스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 근처 타라즈와 탈라스 부근으로 추정된다. 중국식 이름 怛羅斯(Dáluósī)는 현장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두환은 그 도시를 추이 강의 서쪽 배수로 근처에 위치시켰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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